대한민국 대표 그룹 부활의 리드보컬 박완규입니다. 1997년 5집 앨범 ‘Discovery of Fire’로 데뷔했다.
저는 1973년 11월 7일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습니다. 174cm / 70kg으로 큰 키는 아니지만 탄탄한 체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창시절 학생회장을 맡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라는 소문이 있다. 어린 시절 꿈이 검사가 되는 것이었지만 집안 사정으로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장사를 하면서 부기와 회계를 배우기가 어려웠는데 그때부터 밴드 활동을 하면서 가수의 꿈을 꾸기 시작했어요.

가수로 데뷔하기 전 송탄 미군기지에서 DJ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실력을 다졌다. 그런 가운데 김태원의 부활 목소리를 테스트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김태원의 누나는 재임 당시 남동생 김태원을 당시 조면 감독으로 소개하며 부활의 모든 멤버들을 노래로 사로잡았다.

당시 김태원은 박완규에게 “하자. 내 말대로 하면 성공할 것이다.”
5집 발매 당시 박완규의 등장으로 이전 부흥곡들과 달리 동시대를 충격에 빠뜨린 뜨거운 목소리의 등장이었다.
천부적인 가수의 퍼포먼스로도 소개되었는데, 가벼운 웃음으로 킬러급의 곡들을 소화해내며 자유자재로 파워풀하고 음량을 보여주고 있다.
‘외로운 밤’의 흥행으로 정점을 찍은 부활이었지만 박완규가 재정난으로 하차했다. 당시 부활 이벤트 비용은 약 120만 원.

소속사가 일부를 맡아 나머지 돈을 4명에게 나누어 주었고, 같은 해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분유값을 지불하기도 어려웠다.
김태원의 성격 탓에 보화보컬의 탈퇴를 한 번도 막지 않았는데 박완규가 그랬다.
“아직 배울 게 많다. 밖에 나가면 깡패와 사기꾼만 있을 뿐.” 만류하려 했지만 박완규의 고집을 꺾지 못하자 “그럼 앨범 하나 더 내자.

이어 ‘천년의 사랑’의 타이틀곡 ‘천년의 사랑’으로 솔로 아티스트로서 대박을 터뜨렸다. 박완규는 공개석상에서 그의 쉰 목소리와 힘찬 어조를 강조함으로써 형상화되었다.
1집 앨범이 대박을 터뜨리며 소속사에 많은 돈을 가져다줬지만 박완규는 제대로 된 정산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부정확한 집계 시스템과 불안정한 저작권 개념으로 인해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노예제 피해자로 기억되고 있다.

개인 활동 당시 거의 100kg에 육박하던 몸무게를 30kg 이상 감량해 다시 부활의 가수로 무대에 섰다. 개인 방송에 출연한 그는 운동을 많이 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등 좋은 생활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한다고 밝혔다.
이후 2004년 부활의 새 리드보컬로 컴백했다. 그는 부활 보컬 역사상 최초의 복귀 가수가되었습니다.

이 대목을 보면 김태원이 박완규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 수 있다.
부활로 돌아온 후 그는 부활의 음악에 맞게 노래 방식을 변경했습니다. 솔로 활동 당시 가늘고 날카로운 변신으로 쉰 목소리에 청량감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목 상태도 차츰 회복되면서 전성기의 모습을 보였다.

박완규는 1994년 22세의 나이로 결혼했다. 아이 둘을 두었지만 그룹 활동과 솔로 활동으로 많은 히트를 쳤으나 결산 자체가 월 100만 정도를 벌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고 결국 생활고로 이혼했다.
하지만 2011년 다시 돌아오면서 상황은 다소 개선됐지만 이혼 사유는 당시 이혼한 아내와 한부모가 무상급식을 받을 자격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혼 후에도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자신을 한 인간으로서 존중한다고 말했다. 또 술값과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생활비는 전처와 자녀에게 간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표적인 방송 활동은 ‘나는 가수다’다. 개봉 당시 큰 화제를 모았고, 김태원, 임재범, 신대철, 김도균이 편집을 맡아 엄청난 라인업을 형성했다.
나가수는 출연 당시 임재범의 ‘고백’, 김현식의 ‘사랑했다’, 대장금의 ‘하망연’, 김목경의 ‘더’ 등 수많은 곡을 편집했다.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이들은 복면가왕과 최근 개봉한 ‘삼시세끼’에 출연하며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앞으로도 꽃길만 걸을 박완규, 영원히 로커가 될 수 있도록 응원할게요.
